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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것

 상주 목사 김공이 공관 동쪽에 정자를 짓고, 이 글을 내게 보내어 정자의 이름과 기문를 지어 달라며 말하기를,

 

 "누가 능히 더러운 것을잡고 물로 그것을 씻어 버리려 하지 않으랴. 다만 상주의 괴로운 더위를 내가 이 정자로 하여금 없앴으니 그대는 내 부탁들 사양치 말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컨대, 신출(1361)년 겨울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거둥하시었고, 그 이듬해 봄에 다시 상주에 거둥하셨는데, 그때 나는 승선으로 아침 저녁으로 임금을 시종하였다. 그런데 그해 가을에 임금께서 청주로 처소를 옮겼는데, 혹서기를 당해 고생이 괴로움을 겪은 탓이리라. 당시에 매우 안타까운 일은 '상주는 신라때부터 큰 고을이었다는데 정자와 놀이터가 이다지도 없을까'하는 것으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나와 동년인 박헌납의 글과 문인 김남우, 그의 족인 김계의 말을 듣건대, 이 정자는 맑은 물에 손발을 담그고 더운 기운을 씻는 것과 같이 시원하다고 하였으니, 그 즐겁고 다행함을 어찌 말하랴. 

 

 대저 사시(사계절)의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를 흘러 추위와 더위와 따뜻하고 서늘한 것이 다른 법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그에 따르는 길에도 그 나름의 도가 있다. 그러나 소나무,돌, 물, 샘과 같은 경치의 흥과, 음악을 듣고 술 마시는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에 쏠리면, 춥고 더운 것이 내 마음을 동요하지 못하러니, 다만 이는 무슨 연유인가? 이는 외물에 마음을 잃은 이유이다. 이 두가지가 아니고는 천시에 순응하고 내 뜻을 펼 것은 바람 쐬고 시를 읊어 노래하는 일뿐이다.

 

 무우에서 놀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니 가슴이 후련하여 한 점 부끄럽도 없더라. 하물며 바위, 비, 추위의 원망이 내 마음을 더럽히랴. 절부를 지니고 이곳을 지나는 이에게 봄옷이 이미 이루어졌을 때와 같이 맑은 기운이 넘쳐 흐른다면 상주 백성들은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래서 감히 이 정자를 '풍영'이라 붙이기를 청하는 바이다.

 

 공사를 치를 내력은 대체로 일상 일과 같거니와, 여기에 기록할 만한 일이 넷 있다. 김공이 올 초여름에 일을 보면서 즉시 공관의 무너지고 허물어진 곳을 고치려 하였다. 그랬더니 난데없는 폭풍이 일어 아름드리 나무를 뿌리채 뽑아 좋은 재목이 산같이 쌓였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다. 여기에서 여러아전에게 각각 일을 나누고 자신이 스스로 역사를 감독하여 백성은 어느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공장이들이 힘들여 공관을 수리한 뒤에야 정자를 지으니, 이것이 그 둘이다. 풍영정은 역사할 적에 더러운 흙을 걷고 지형을 따져 파 보니 옛날의 터가 뚜렷해졌다. 이는 공의 역사하는 마음이 옛사람과 같다 하겠다. 다만 정자를 묘하게 지은 솜씨는 옛보다 나으니, 이것이 바로 그 세 번째이다. 공이 정사를 정리하는 동안 은혜와 위엄이 함께 나타나 백성들도 화합하며, 명예와 공적이 뛰어나고, 사사로운 공역에도 역시 차서를 지키니 이것이 그 네 번째 일이다.

 

 담을 둘러 동산을 꾸미고, 시냇물을 끌어다가 못을 지으며,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니, 이로써 사방이 시원하고 너르며, 뭇봉우리가 둘러서 호위하는 것 같으니, 대략만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뒤에 여기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읆어, '나는 증점에게 허여하리라 한 큰뜻을 얻는 자라면 그 무엇으로 김공에게 보담할 터인가. 이를 아울러 기록하되, 김공의 이름은 남득으로 경진년에 진사가 되고 안팎을 두루 지나 중한 이름에 올랐다. 나는 그를 공경하기에 사양하지 않고 기문을 짓는다.

 

 

기유(1369)년 12월 아무 날에 쓴다.